오늘은 우리나라를 액션을 대표하는 영화 쉬리에 대하여 알아볼까합니다. 우리나라 분단의 아품과 지금봐도 전혀 시대를 느껴지지안는 시나리오로 큰 호평을 받았던 이 영화는 9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아니 영화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쉬리라는 제목을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극장가가 외화 일색이던 시절, 낯설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입소문을 타며 연일 매진을 기록했던 영화. 당시 상황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붐은 단지 영화 한 편의 흥행을 넘어, 한국 영화가 국내에서 ‘팔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증명해보였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요즘같이 레트로 감성이 유행하는 시점에, 쉬리는 단지 ‘추억의 영화’가 아니라 지금 다시 꺼내 봐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작품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상징성과 더불어, 배우 최민식이 이 영화에서 남긴 강렬한 인상, 그리고 국제영화제에서의 반응까지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레트로 열풍에 다시 보는 쉬리의 감각
당시 쉬리가 남긴 인상은 단지 ‘한국 영화 치고 괜찮다’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그 전까지 한국 영화는 마치 밥상머리에서 누룽지 긁는 느낌이었다고요. 익숙하지만 가벼운 맛이 없고, 주로 멜로나 가족극 중심이었죠. 그런데 쉬리는 말 그대로 장르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그 틀을 깨뜨려버렸습니다.
지금 보면 몇몇 장면이 조금은 과장되거나 전개가 빠르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과감한 시도였다는 걸 감안해야 합니다. 수중 폭파 장면, 도시 한복판 총격전, 정적과 음악의 조화 등은 요즘 한국 영화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연출입니다. 이런 장면들이 단순히 ‘멋져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야기 흐름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장치였다는 게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다시 보면 쉬리는 ‘한국 영화는 이 정도는 된다’는 자존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요즘 레트로 콘텐츠를 접하는 Z세대에게도 쉬리는 그냥 낡은 영화가 아니라, 감정선과 서사 구조에서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살아있는 영화’로 다가갑니다. 사실 이런 감각이야말로 레트로 열풍이 가진 본질 아닐까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그 시대가 왜 중요했는지를 다시 묻는 과정. 그런 의미에서 쉬리는 지금 시대에 더 어울리는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최민식, 쉬리에서 터뜨린 배우의 가능성
지금이야 최민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어떤 무게감이 떠오르지만, 1999년 당시에는 ‘그 배우 누구지?’ 정도였습니다. 쉬리는 그에게도 터닝포인트였고, 한국 영화계에도 새로운 연기 스타일을 제시하는 계기였습니다.
그가 연기한 박무영은 원래 텍스트로만 보면 꽤 단선적인 인물일 수 있습니다. 북한 요원, 냉혈한, 복수심, 뭐 이런 요소들이죠. 그런데 최민식은 그 캐릭터를 단순히 냉정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순간마다,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역사적 무게와 인간적인 흔들림이 느껴졌습니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에 관객들이 숨을 멈추게 됐던 이유입니다.
사실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말은 흔합니다. 하지만 쉬리에서의 최민식은 단순히 잘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연기로 캐릭터를 재창조한 경우에 가깝습니다. 그가 맡은 인물은 이야기 전개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일 뿐 아니라, 관객의 정서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이었습니다. 그래서 극 중 후반, 충돌이 격화될수록 그의 연기가 더 두드러졌고, 영화 전체의 밀도도 따라 올라갔던 겁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쉬리의 박무영은 이후 ‘신세계’의 정청, ‘올드보이’의 오대수,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 같은 캐릭터들의 원형이 된 셈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이 영화였다는 점에서, 다시 보게 되는 감정이 큽니다. 연기를 넘어선 존재감. 쉬리에서 최민식은 그런 순간을 보여줬습니다.
국제영화제가 쉬리를 본 시선
사실 쉬리가 처음 해외로 소개됐을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한국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그걸 주목해줄지도 미지수였거든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습니다.
도쿄국제영화제에서는 아시아 주요 매체들이 집중 조명을 했고, 시애틀과 하와이 영화제에서도 상영 당시 관객 반응이 좋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주요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국 영화도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외신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영화의 “할리우드식 플롯과 한국적 정서의 혼합”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상충될 수 있는 요소들이지만, 쉬리는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켰습니다. 특히 남북이라는 소재는 외국인들에게 매우 생소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롭게 받아들여졌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해외 매체 몇 곳에서는 최민식과 한석규의 연기에 대한 언급도 등장했고, 연출력에 대해서도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는 할리우드 중급 이상 수준”이라는 의견이 실렸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우리 입장에서 그 정도 평가도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졌죠.
가장 중요한 건, 쉬리를 계기로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해외에 소개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물꼬를 튼 영화였고, 이후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들이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 셈이죠.
지금 다시 쉬리의 해외 반응을 살펴보면, 단순한 외화 수출이 아니라 문화적 전환점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시기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엔 우리가 그걸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시작점은 분명했습니다. 그 자리에 쉬리가 있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