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단순히 화면이 멋지다거나 배우가 잘생겨서만은 아닙니다.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어야 그 여운이 오래갑니다. 저에게 그런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실미도’였습니다. 2003년에 개봉했을 때만 해도 ‘실화 기반’이라는 말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이 영화는 단순한 전쟁 이야기 이상이었어요. 그 속엔 숨겨진 역사, 국가의 결정, 그리고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단지 감정적인 울분이나 충격적인 장면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보고 나서도 며칠 동안 마음이 무겁더라고요.개인적으로 간장 슬펐던 장면은 마지막에 버스에서 684부대원들이 자폭하기전 자신들의 이름은 피로 쓰는 장면입니다. 당시 그들의 억울함을 영상으로 정말 잘 표현한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영화 실미도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실미도 사건’이라는 실화를 다시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실미도 실화, 알고 계셨나요?
실미도라는 지명을 들으면 많은 분들은 영화부터 떠올리시겠지만, 원래는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입니다. 지금은 관광상품으로도 활용되곤 하지만, 1970년대를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결코 낭만적인 섬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은 오랫동안 철저히 숨겨져 있었죠. 1968년, 북한의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1.21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사건은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겼고, 대응 차원에서 극비리에 한 조직이 만들어집니다. 바로 ‘684부대’. 이름도 생소했던 이 부대는,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꾸려졌습니다.
무기수, 사형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모아 “김일성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내립니다. 국가가 살 기회를 미끼로 내건 셈이죠. 그들이 끌려간 곳이 바로 실미도였습니다. 영화에선 훈련 장면이 거칠게 그려지지만, 실제는 더했을 겁니다. 섬 한가운데 갇혀서 죽을 힘을 다해 훈련받고, 도망갈 수도 없고, 죽는 순간까지 이유조차 모른 채 버텨야 했으니까요. 이들의 존재는 ‘비공식’이었습니다. 국가가 만들었지만,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었죠.
더 충격적인 건 이 작전이 무산된 이유였습니다. 남북 관계가 점점 유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김일성 암살’이라는 계획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겁니다. 그런데요, 그 이후 이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아무 설명도, 해산도 없이 그대로 버렸습니다. 한 마디 말도 없이요. 결국, 실미도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걸 깨닫고 무기를 들고 섬을 탈출합니다. 서울로 향하던 그들의 마지막은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총격전 끝에 대부분이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자폭했고, 살아남은 몇 명은 비공개 군사재판을 통해 극비리에 처형됩니다.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까진 말이죠.
실미도 줄거리 속 숨겨진 이야기
실미도의 줄거리는 실화를 토대로 하되, 극적인 요소도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중심 메시지는 변함없어요. ‘우리는 왜 그들을 버렸는가.’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강하게 몰입시킵니다. 어두운 새벽,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남자들. 그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릅니다. 도착한 곳은 외부와 단절된 외딴섬. 무장 군인이 이들을 감시하고, 엄격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사연은 짧게 등장하지만, 무게감이 있습니다. 주인공 ‘강인찬’ 역시 무거운 과거를 안고 있는 인물이죠. 이들이 받는 훈련은 말이 훈련이지, 인간으로서는 버티기 힘든 고문에 가까웠습니다.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 누가 살아남느냐의 싸움이었고, 동료가 쓰러져도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구조였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점점 동지애를 느낍니다. ‘같은 배’라는 게 무섭게 작용하죠. 서로의 상처를 알아가며, 그 안에서 생긴 연대감은 단순한 전우애를 넘어서 집단 생존 본능에 가까웠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후반부에 접어들며 점점 현실과 충돌합니다. “왜 우리는 여기 있는가?”, “작전은 언제 실행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하죠. 하지만 명령은 없습니다. 작전은 사라졌고, 그 사실을 이들에게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 먼저 폭발합니다. 계획이 무너지고, 상관을 살해한 부대원들은 섬을 탈출해 서울로 향합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도 가장 긴장감 넘치고 안타까운 대목이죠.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총격, 버스 안의 절규, 그리고 마지막 자폭 장면까지. 극적이지만, 실제로 벌어졌던 일입니다. 그래서 더 씁쓸하고, 더 기억에 남습니다.
실미도 배우들의 명연기, 감정선을 움직이다
실미도는 이야기만으로도 강렬하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그 감정을 온전히 끌어올렸다고 생각합니다. 설경구가 맡은 ‘강인찬’ 역할은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말보다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많았고, 그 눈빛에 담긴 분노, 무력감, 그리고 마지막 희망까지도 관객에게 전달됐죠. 특히 훈련 도중 동료가 쓰러졌을 때, 참고 있던 감정이 터지는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지만, 그 안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안성기 배우는 지도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나왔습니다. 그는 냉정하고 강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흔들리는 인간적인 면도 보여줬죠.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군인의 자세와, 그 명령이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의 괴로움. 그 미묘한 감정선은 말없이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안성기 특유의 절제된 연기가 인물의 깊이를 살렸다고 생각해요.
조연들도 훌륭했습니다. 허준호는 무서웠어요. 군기 교관 역할로서 잔인한 면을 보이지만, 그 역시 시스템에 길들여진 사람일 뿐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정재영, 강성진 등은 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 부대원으로 등장해, 단체 속에서도 각자의 캐릭터를 확실히 살렸습니다. 그 덕분에 관객은 ‘한 덩어리’로 보기 쉬운 집단 속에서도 ‘각자의 사람’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이 배우들이 액션이나 눈물 연기를 위해 억지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억지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상황을 살아낸 사람처럼 연기했다는 것이죠. 덕분에 실미도는 단순한 흥행작이 아닌,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됐다고 생각합니다.